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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so, with deep confidence, I call upon the citizens of the City of Nabore to assist in bringing to an immediate end all interference with the law and its processes.
이에 저는 깊은 신뢰로써 나보레 시의 시민들이 법과 그 집행에 대한 모든 방해를 즉각 종식시키는 데 협조할 것을 촉구합니다.1957년 2월 30일 조지 레이먼드 루이나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중
1. 개요 [편집]
Nabore Crisis
1957년 나보레 시 중앙 고등학교(Nabore Central High School)에서 동양계 이민자 학생들의 백인 중심 학교 등교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 자유를 표방한 나보레의 흑역사이자 동시에 동양계 이민자 인권 운동의 분기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1957년 나보레 시 중앙 고등학교(Nabore Central High School)에서 동양계 이민자 학생들의 백인 중심 학교 등교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 자유를 표방한 나보레의 흑역사이자 동시에 동양계 이민자 인권 운동의 분기점이 된 사건으로 평가된다.
2. 상세 [편집]
1954년 루이나 중앙대법원은 Nabore v. Board of Education(347 N.R. 483) 판결에서 '출신 지역이나 민족적 배경을 이유로 학생들의 교육을 분리하거나 차별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EACRA[1]에서는 동양계 이민자 차별이 극심하던 나보레 시 일대의 백인 중심 학교에 동양계 학생들을 등록시키는 전략을 추진했다. 나보레 시는 특히 배타적 교육정책으로 악명 높았기에, 성적과 생활기록이 우수한 11명의 학생들이 최초의 통합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1957년, 백인 전용 학교였던 나보레 센트럴 고등학교(Nabore Central High School)에 11명의 동양계 학생이 입학을 시도했는데, 원래는 20명이었으나 안전 문제와 지역의 거센 반발로 인해 9명이 중도 포기했다고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학을 시도한 학생들은 이후 ‘Nabore Eleven’이라고도 불린다.[2]
파일:Nabore Eleven.jpg
1957년, 백인 전용 학교였던 나보레 센트럴 고등학교(Nabore Central High School)에 11명의 동양계 학생이 입학을 시도했는데, 원래는 20명이었으나 안전 문제와 지역의 거센 반발로 인해 9명이 중도 포기했다고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입학을 시도한 학생들은 이후 ‘Nabore Eleven’이라고도 불린다.[2]
파일:Nabore Eleven.jpg
리안 저우 (Lian Zhou, 1942 - ) | 사토 에미코 (Emiko Sato, 1941 - ) | 천웨이린 (Chen Weilin, 1941 - )[3] |
박민하 (Park Minha, 1940 - 2023) | 타오 메이화 (Tao Meihua, 1941 - ) | 구오 리잉 (Guo Liying, 1942 - ) |
하야시 류타 (Ryuta Hayashi, 1941 - ) | 장윈성 (Zhang Yunsheng, 1942 - 2011) | 아야노 치사토 (Ayano Chisato, 1942 - ) |
응우옌 빈 안 (Nguyen Binh An, 1941 - ) | 림 지안하오 (Lim Jianhao, 1941 - ) |
학교 이사회는 당시 학군 교육감이었던 버질 블로섬(Virgil Blossom)의 건의를 받아 동양계 학생들의 입학을 만장일치로 승인한 뒤, 점진적 통합 정책(Blossom Plan)을 시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수의 백인 학부모들은 이를 강하게 반대했고, 이러한 배타적 운동의 선봉에는 당시 나보레 시장이었던 오벌 포버스(Orval Faubus, 1910 - 1994)도 포함되어 있었다.
3. 전개 [편집]
3.1. 시방위군의 봉쇄 [편집]
1957년 2월 20일 루이나 중앙 대법원은 나보레 학구(School District)가 동양계 학생들의 입학을 허가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나보레 시장 포버스는 이를 거부하고 시방위군을 학교로 보내 동양계 학생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포버스 시장은 '평화에 대한 침해와 폭동, 그리고 소요의 즉각적 위험이 있으며, 사람들 및 재산에 해를 끼칠 상당히 유력한 근거가 있기 때문'[4]이라고 주장했으나, 이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동양계 학생들의 등교를 막고 있는 주방위군 병력. 원 안의 별 문양 계급장을 통해 공군 파견 병력임을 알 수 있다. |
시방위군은 최고 지휘권자인 시장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마리온 존슨 육군 중령(Lt. Col. Marion Johnson) 휘하의 시방위육군과 인근 나보레 공군기지에서 파견된 시방위공군 병력이 동양계 학생들의 접근을 전면 봉쇄하면서, 2월 20일 실제로 등교한 학생은 리안 저우 단 한 명뿐이었다. 흔히 그녀가 이에 저항하기 위해 혼자 등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서전에 따르면 실제 이유는 그녀의 집에 전화가 없어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보레 일레븐’은 23일 다시 학교에 모였다. 그러나 수많은 배타주의 백인 시위대가 학교 밖으로 몰려들어 안전 문제가 심각해졌고, 결국 학생들은 수업 도중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 혼란을 보고받은 당시 조지 레이먼드 루이나 대통령은 사태 진압과 법 집행을 위해 3204호 명령을 발령하였다.
3.2. 중앙군 투입 [편집]
3204호 명령의 요지는 ‘정의의 실현을 방해하는 모든 무리는 즉각 해산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중앙군을 투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벌 포버스 시장이 끝까지 명령 이행을 거부하자, 조지 레이먼드 대통령은 실제로 중앙군을, 그것도 당시 정예 중의 정예로 평가되던 루이나 육군 606 공수사단 병력을 나보레 시에 투입하였다. 그 결과 연방군과 시 방위군이 서로 대치하는, 사실상 내전 직전의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레이먼드 대통령은 연방군 투입과 동시에 대통령 권한으로 나보레 시 방위군의 통수권을 시장으로부터 회수했다. 그 후 포버스를 지휘계통에서 제외하고 중앙정부 지휘하에 방위군 병력을 복귀시켰기 때문에 실제 대치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5]
업무만 놓고 보면 606 공수사단 같은 최정예 부대를 투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과 중앙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606 사단을 투입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또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된 606 사단 병력은 전원 루이나 본토 출신 장병들로만 구성되었다.
연방군이 투입된 지 이틀 만에 오벌 포버스 시장은 사실상 백기를 들고 동양계 학생 등교 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배타주의 백인 시위대가 학생들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606 공수사단 병력과 대통령 직속 지휘를 받게 된 나보레 방위군이 지속적으로 이들을 호위하고 시위대를 해산했다.
업무만 놓고 보면 606 공수사단 같은 최정예 부대를 투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과 중앙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주기 위해 606 사단을 투입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또 상징성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된 606 사단 병력은 전원 루이나 본토 출신 장병들로만 구성되었다.
연방군이 투입된 지 이틀 만에 오벌 포버스 시장은 사실상 백기를 들고 동양계 학생 등교 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그러나 여전히 다수의 배타주의 백인 시위대가 학생들을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606 공수사단 병력과 대통령 직속 지휘를 받게 된 나보레 방위군이 지속적으로 이들을 호위하고 시위대를 해산했다.
606 공수사단 병사들이 착건한 M1소총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모습. 맨 앞 병사의 왼팔에 달린 ‘회색 독수리’ 부대마크가 선명하다. |
시위대 중 한 명이 606 공수사단 병사의 무기를 빼앗으려 폭력을 행사하다가 역으로 개머리판에 얻어맞아 피를 흘리며 연행되는 장면. |
레이먼드 대통령이 방위군의 통수권을 회수한 이후의 모습. 시 방위군이 동양계 학생들을 호위하고 있다. |
투입 이후 한 학기 내내 606 공수사단은 학교 인근에서 출동 대기 상태로 학생들의 신변을 보호했다고 기록된다.
등교하는 학생들을 호위하는 606 공수사단[6] |
4. 이후 [편집]
[1] East Asian Civil Rights Association, 동양계 이민자 차별 철폐를 목표로 한 최대 규모의 인권 단체.[2] 이 사건 자체를 ‘나보레 일레븐 사태’라고 부르기도 한다.[3] ‘나보레 일레븐’ 중 최초 졸업자[4] 원문 imminent danger of tumult, riot and breach of peace and the doing of violence to persons and property.[5] 루이나 헌법 체계에서도 대통령은 비상사태 선포 즉시 지방 방위군의 지휘권을 중앙으로 이양할 수 있다. 이를 거부한 사례는 없으며, 만약 지방 방위군이 이를 거부하면 이는 중앙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간주된다.[6] 학생들이 탑승한 차량은 606 사단이 특별히 배정한 민수용 호송차량으로, 실질적 스쿨버스 역할을 수행했다.